입학식과 동시에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집과 부모형제를 뒤로하고 낯선 객지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요.
거처로 정해진 외삼촌댁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하고 계셨고.....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낯익은 얼굴이 없었기에 어찌나 서글픈 생각이
드는지 참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르지 집 생각하고 부모님 얼굴밖에 떠오르질 않았어요.
그래도 공부를 하기위해 온 거니까 힘들어도 참을 수밖에는 없었죠.
학교를 오고 갈 때마다 타보는 앞뒤 없는 전차와 버스를 타는 것이 신기로우면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에 괴로움을 빠르게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걸어서 밖에 다닐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영광 이었죠.
1960년대의 서울은 초라했습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은 버스와 택시 그리고 화물차가 대부분이고 자가용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경제는 어려운 시기였지요.
서울에서의 생활과학교는 시간이 갈수록 잘 적응이 되어가고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외출했다 돌아오신 외숙모님께서 수심이 가득 쌓인 표정으로 말씀하시길 괜히 밥
잘 먹고 편하게 학교를 다닐 애를 서울까지 올라오라 해놓고 고생만 시킨다며
외삼촌을 원망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 집에서 널 데리고 있으면 고생시키려고 오게 한 것밖에 안되니까
집에다 연락해서 다른 데로 옮겨달라고 이야기를 전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한숨만
쉬시고는.끝내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영문도 모르고 있던 나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얼까?
궁금하기만 했지요.
나중에 안일이었지만 그날 저녁 지을 쌀도 외상으로 가져왔거니와 당장 내일부터도
아무대책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는 쌀뿐만이 아니고 된장 간장 고추장 등...
다른 먹거리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였기 때문이죠.
참 괴로운 시간 이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집 생각이 너무너무 나서 저녁이면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고 있던
때라 서글픈 마음이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부터는 하루끼니를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생활이 지속
되더라구요. 참마음이 많이 아팠지요.
그때 외삼촌께서는 인천중공업 챠트실에 근무를 하셨는데 그림솜씨가 대단했거든요.
하루는 사진관에서 찍은 명함판사진을 한 장 내놓으시고는 이력서에 사용할 사진이
더 필요 하신다며 그 사진을 보시고 그대로 그려 내시는걸 보았을 때는 외숙모님
께서도 재주꾼은 재주꾼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 어른들 말씀에 재주가 많은 사람은 가난하게 산다더라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외삼촌 같은 분을 두고 하시는 말 이었나봅니다.
이 일이 있는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다른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쪽도 사정은 역시 비슷했습니다만 마땅하게 다른 곳으로 갈 데가 없으니
우선 머물면서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지요.
집을 떠난 객지가 한없이 후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자식하나 잘 가르쳐 볼 거라고 결정한 것이 큰 짐이 된 셈이죠.
궁리 끝에 아버지께서는 방을 하나 얻어 줄 테니까 작은누나가 올라가서 밥을 해주며
같이 있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하시며 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친척 분들한테 부담을 드린 것이 무척 죄송하기만 했습니다.
또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해주시는 부모님은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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