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속으로...

호국인촌에 오시면

호국영인 2013. 12. 18. 19:04

 

호국인촌에 오시면 


호국인촌을 들어서려면 조그만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징검다리만으로는 개울을 건너기가 쉽지 않고, 개울의 너비가 넓어 물이 불어나더라도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형승용차 한 대가 겨우 건너올 수 있을 정도의

작고 보잘 것 없는 다리입니다.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

호국인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무심코 들어옵니다.

다리에 특별한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의미도 부여되어 있지 않으며,

렇다고 다리 모양이 유별나지도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지치고 힘들었던 피로가 일시에 사라집니다.

병고에 시달리던 분이라면 그런 기분을 더욱 강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여기 머물면 말끔하게 병이 나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일부러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병고에 지친 몸을 이끌고 호국인촌까지 힘들게 찾아온 많은 분들이 지병이 나은 밝은 얼굴로

다시 그 다리를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호국인촌을 들어올 때는 세상 밖의 티끌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몸이 다 나아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이 다리는 그만큼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리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이때까지 사설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되는 호국인촌에 머무는 분들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호국인촌을 들어오시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하룻밤 묵어가시더라도 잠자리에 들면,

바깥세상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 사정들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거나,

나중에 그 일을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일이 걱정되어 그 일을 골똘하게 생각하더라도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곧 그 일이 생각나지 않게 됩니다.

잠시 뒤 다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일에 골몰하기 위해 집중해 봅니다만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마음이 편안하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사연들이 얽혀있는 세상사를 젖혀두고 마음이 편안하게 변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그만큼 홀가분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말로 한다 해서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설마 그럴까 하고

먼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여기에는 선생님의 큰 뜻이 담겨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렸던 분이 호국인촌을 찾아오신 것은

자신의 지긋지긋한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질병은 마음의 병이라고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져야

병을 고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기 위한 배려에서입니다.

눈만 뜨면 아옹다옹하며 재물과 명리에 눈이 먼 사람들일지라도

마음이 편안하면 그 재물과 명리도 보잘 것 없는

욕망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앞으로 살아갈 세월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재물을 모았으며, 앞으로도 얼마만큼 재물을 모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도

문득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버리고 갈 것이 중요한지,

가지고 갈 것이 중요한지 생각하게 되면 탐욕에 어두웠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지고 갈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버리고 갈 것은 꼭 재물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ㆍ심신ㆍ정신의 ‘삼신’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육신과 심신은 한 줌 흙으로 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영혼이 혼탁해지면 오염되거나 파괴되어 영원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과 재물이 항아리 안에 담겼다고 생각해 보면

왜 마음이 편안해져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은 한 번 혼탁해지거나 오염되어 파괴되면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다

그것을 막상 보충하려 해도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보충하거나 재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재물은 오염되거나 파괴되더라도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재생하거나 복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써버렸던 것만큼 다시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력하면 재물을 어느 정도 모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누구나 다 아는 이 문제는 결국 이런 결론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물질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만들어지고 마음내키는 대로 사용하면서 망가지기도 하고

새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능력,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망가뜨린 인간의 영혼은 그것을 본래의 모습대로 새로 만들거나 채울 수가 없다.』

결국 영혼의 문제는 아무리 위대한 과학문명이나 과학기술일지라도 그것을 치유하거나

환원시킬 수 없는 인간의 능력 밖이라는 말입니다.

호국인촌을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의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첫 번째 경험을 대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참 편안하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

물론 이런 느낌들이라면 최면술로도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최면술로도 설령 가능하다고 쳐도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느끼는 것과

타의에 의해 강제로 느끼는 경험은 실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른 것입니다.

또 다른 의문으로는, 자연스럽게 그런 느낌이 든다면

자신의 의지와도 아무 관계없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대답은 ‘예’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 일이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조금 순화시켜 부드럽게 표현한다면

‘고정관념’ 또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숲 속에 둘러싸인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숲과 개울이 흐르면 오히려 찬 기운이 감돌지 마음이 편안할 만큼

온화한 느낌이 들 린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가 없으니 본인이 직접 체험으로 느끼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다만 호국인촌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 기운은 우리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밖의 일로서 선생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구상의 모든 곤충이 수차례의 변태과정을 거쳐 날개를 펴는

‘우화’(羽化) 과정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나비의 경우에도 알에서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이윽고 성충이 되어 마지막으로 날개를 펴기까지 숱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비의 우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얻어 태어난 다음 생육과 성장기를 거치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성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룬 다음 자신의 뒤를 이어갈 후세를 잉태해

키우다가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우화와 비교한다면 창공을 훨훨 나는 나비의 날갯짓은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호국인촌을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에게 통나무 하나씩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누구든 이 통나무를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누구든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 통나무에 자신의 모습을 조각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현재의 자기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잘 모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진정한 자기 모습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때로는 일그러지고 망가져서

추악한 얼굴 모습을 가지고 있는 바깥의 모습일 뿐,

본래의 맑고 깨끗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통나무를 깎고 다듬다보면 본래의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파를 흐리지도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으며,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본래의 자기 모습이

조각되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조각해 놓고도 이 모습이 정말 자기 모습인지 반신반의하거나,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버린 자기 얼굴을 보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스스로를 트집 잡아 거북할 만큼 스스로에게 왜 이런 모습이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조각했든,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을 조각했든

그것이 자기 안에 들어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 자기 모습을 조각했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태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호국인촌을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마다 각자의 삶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갖가지 사연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에 종사했으며,

또 어떤 일에 얽매여 있든,

창공을 훨훨 나는 한 마리의 나비도 번데기 껍질을 벗어던진 뒤에야 진정한 자유의 날갯짓을 하듯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견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자신의 영혼도 맑고 깨끗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자유인을 위해 선생님께서 만드신 호국인촌을 들어오시면

바깥세상에 얽혀있던 자질구레한 걱정들이 멀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화’와 ‘통나무’ 이야기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둔다면

혼탁한 세상사에서 맑고 깨끗한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현재의 자기 모습을 찾는 데에는 상당히 유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