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이야기

'명성황후 시해' 가담 자백..일본 하급장교 편지 공개돼

호국영인 2013. 8. 29. 12:08

 

'동학농민 학살' 미야모토 소위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28일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일치 편지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박 교수는 미야모토가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핵심 주범임을 보여주는 당시 일본군 헌병사령관의 전보도 함께 공개했다. 이 전보는 미야모토가 당시 현장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는 목격담과 자백 내용을 담고 있다. 미야모토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 사건 직후 기소됐다가 무죄 방면됐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박 교수는 당시 '토벌대' 소속 병사가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전문 사본 및 번역본도 공개했다. 종군일지는 지난 6월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공저)에 그 존재 사실과 일부 구절이 수록(<한겨레> 7월23일치 1·2면)됐지만, 작성자나 일지의 구성, 내용 전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 동학토벌대, 경기·충청·경상도 농민들도 무차별 학살
일 병사 '종군일지'서 드러난 일본군 만행

박맹수 원광대 교수가 28일 공개한 동학 농민혁명 당시 일본 진압군 병사의 종군일지 전문은 지난해 봄 박 교수의 공동 연구자인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작성자의 고향인 시코쿠 도쿠시마현에서 입수한 것이다. 박 교수는 이 일지와 함께 동학농민 학살을 자행한 후비보병 제18대대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편지 등도 공개했다. 박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데라우치 마사타케 관계문서 목록'에서 찾아낸 이 편지는 미야모토가 당시 운수통신장관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보낸 것이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1894년 12월3일 충청도 옥천 "일대 60일 농가 수백호 타고 없어 수많은 시신 길에서 썩고 있었다" 12월19일 경상도 김천, 23일 거창 "농민 10명 죽이고, 잔당 8명 총살" 1895년 1월7~14일 전라도 장흥 "통행하는 남자를 모두 잡아 고문 저항하면 옷에 불붙이고 시신 태워"

■ 구스노키 상등병의 종군일지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 출신인 구스노키 비요키치는 1894년 7월23일 후비역(현역과 예비역을 마친 다음의 병역) 보병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 병사로 소집된다. 그해 10월28일 일본군 대본영은 그의 부대를 '동학당 토벌대'로 명했고, 부대는 11월6일 인천에 상륙한다. 이틀 뒤 서울 용산 만리창에 집결한 토벌대는 11일 동로·중로·서로 '3로'로 나뉘어 진압에 나선다. 구스노키는 소집 당일부터 1895년 12월9일 귀국 뒤 부대 해체 때까지 일지를 계속 썼다. 길이 9m23㎝, 폭 34㎝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문서는, 구스노키의 일지 메모를 그의 친척 구스노키 마사하루가 동학 학살이 끝난 지 3~4년 뒤 정서한 것이다.

일지 속 일본군 토벌 경로를 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군대해산에 분노한 동학봉기(제2차 봉기)가 전라도만이 아닌 전국적 봉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학살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서도 자행됐다. 먼저 광주와 장호원 등 경기도 일대를 훑어가던 구스노키 등이 처음 학살을 자행한 곳은 곤지암. 11월14일 동학 접주 김기룡을 체포한 토벌대는 그를 이천 병참부로 압송한 뒤 그날 저녁에 총살하고 "집집마다 수색해 달아나는 자들을 모두 총살"했으며, 부녀자 13명을 구금했다. 17일에는 가흥 북쪽 동막읍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농민 18명을 죽이고, 접주 이경원을 체포해 총살했다.

충청도로 이동한 부대는 21일 청풍 인근 동학 접주 집과 40리 떨어진 성내동의 모든 민가를 불태웠다. 22일 제천 접주 한 명을 체포해 총살했고, 그 다음날 청풍현 민가 수십 채를 불태웠다. 12월13일 충주 인근에서 동학 접주를 체포해 총살했고 16일엔 경상도 상주목사의 서기관 박용래를 체포해서 고문한 끝에 관직을 박탈한 뒤 추방했다. 18일 개령의 관리들 수십명을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모두 총살했다. 19일 김천에서 농민 10명을 죽이고, 23일엔 거창 촌락을 수색해 8명을 체포해서 총살했다.

26일 전라도 남원에서 농가들을 불태웠다. 28일 "제3중대 소속 스기노 도라키치 상등병이 12월10일 연산전투에서 농민군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들을 학살하던 그들은 단 한 명의 일본군 사망 소식을 듣자 슬퍼하며 울었다. 30일엔 남원 일대 절과 민가들을 불태웠다. 31일 곡성에서 농가 수십호를 불태웠고 그날 밤 농민군 10명을 체포해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을 불태워 죽이게(소살) 했다.

1895년 1월2일 옥과에서 농민군 5명을 고문한 뒤 총살하고 시신은 불태웠다. 4일엔 능주에서 농민군 70~80명을 체포, 고문하고 20명 정도를 총살했다. 5일, 능주에서 또 농민군 수백명을 체포해 수십명을 총살했다. 7일엔 장흥에 들어가 40~50호의 농가를 불태우고 농민군 10명을 죽였다. 8일에도 장흥에서 착검 돌진(돌살)과 일제사격, 방화를 자행한 뒤 "대일본 만세!"를 삼창했다. 9일 역시 장흥에서 8명의 농민을 생포해 3명을 타살(때려죽임)했고, 이어서 도망치던 농민을 추격해서 48명을 타살하고 다친 사람 10명을 생포해 고문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

1월11일 장흥 일대 통행자를 모조리 붙잡아 고문했고, 저항자는 옷에 불을 붙여 달아나면 총을 쏘아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웃었다." 죽청동 인근에선 12살 아이를 꾀어 동학군을 지목하게 한 다음 16명을 고문하고 8명을 총살해 시신은 불태웠다. 죽천 장터에서도 18명을 죽였다. 대흥면 쪽으로 가다 11명의 농민을 붙잡아 죽였고, 3명은 옷에 불을 붙여 바다쪽에 빠져죽게 만들었다. 13일 대흥면 산에서 농민군 수십명을 잡아 죽였다. 길 옆과 도랑에 버린 시신이 수십명이었다. "순창읍의 한 주막에서 동학당 대괴수 전봉준을 포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4일 장흥에서 농민군 17명을 체포해 죽였다. 그날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최동이라는 17살 동학 지휘관을 체포했다. 1월 이래 죽인 농민들이 300명에 달했다. 22일 해남에서 붙잡혀 온 농민군 16명을 총살했다. 31일엔 "동학농민군 7명을 성 바깥 밭 가운데 일렬로 세워놓고 총에 착검을 하고 일제히 돌격하여 찔러 죽였다."

2월4일, "(나주부) 남문에서 4정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의 시신이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 장흥부 전투(1895년 1월8~10일) 이후 수색을 강화하자 숨을 곳 찾기가 어려워진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당해, 책문(고문) 뒤 죽은 중죄인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버려진 시신이 680구에 달하여 근방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하얀 은(백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개입 미야모토 소위 동학 농민군 학살했던 편지도 나와

■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의 편지
데라우치는 동학 농민혁명 당시 일본 육군소장으로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 학살을 주도했고 초대 조선총독이 돼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데라우치 관계문서 목록에는 그의 옛 하급 부관이었던 미야모토가 후비보병 제18대대에 배속돼 농학 토벌에 나섰다가 1894년 12월26일 전주에서 보낸 편지가 들어 있다. 이 편지에는, 그해 10월30일 경성(서울) 수비대로 파병된 제18대대가 파병 목적과는 달리 농민군 학살에 나선 사실이 적시돼 있다. 미야모토는 1895년 1월 전라도 장흥과 해남, 진도 등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제18대대는 그해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개입했으며, 미야모토는 시해의 주범 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방위성이 소장한, 1895년 11월22일 하루타 헌병사령관이 고다마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보(나카쓰카 교수 발굴)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예심 법정에서 장사(정치깡패) 히라야마의 자백에 따르면, (조선) 궁내대신(이경직)을 처음 쏜 것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이며, 그가 그 뒤에 다시 칼로 벤 것은 자신이라고 했고, 그 외 다른 관련자들 진술을 보더라도 미야모토 소위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혐의가 가장 짙다."

~~~~~~~~~~~~~~~~~~~~~~~~~~~~~~~~~~~~~~~~~~~~~~~~

※ 사람이 살다보면 언젠가는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하루이틀간에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주범이 누군지도 모르고 잔인하게 죽어간 왕후의 죽엄을 밝힐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 가담 자백..일본 하급장교 편지가 공개   

    돼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이 얼마나 잔인하였고 또한 동학 농민   

    들을 얼마나 잔인무도하게 죽였다는 자백으로 알게되었다.

   

    그런 일본이 지금 세슘으로 온바다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의 먹거리를 끊어놓는 결과를 만들어놓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도 잔인한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고본다.

    그들은 언제나 잘못을 알고 세상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