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낸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생전에 한번도 아버지라 못불렀죠"
"초등 6학년 아버지 처음 만났을때 남루한 옷차림에 눈에선 광채나 스님은 아버지 아닌 큰 스승"
"그래, 니는 무엇을 위해 사노?" "행복을 위해 삽니다." "그래?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는기라. 그라믄 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노?"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이고, 어떤 것이 일시적 행복입니까?"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는기 아이야. 부유하더라도 인격이 부족하면 불행하고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한기야.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 행복인기라." 6ㆍ25 전쟁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여름.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성철 스님(1912~1993)에게 열여덟 살 딸이 찾아온다.
최근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를 펴낸 불필 스님은 18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기자들과 처음으로 만나 "안정사에서 두 번째로 큰스님을 뵌 이후부터는 (성철 스님은) 아버지가 아닌 큰스승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회고록은 올해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주변의 권유로 펴낸 것이다.
그에게 성철 스님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를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어요. 언니가 있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지요. 아홉 살 때 언니가 죽고 나니, 왜 나는 아버지가 없는가 스스로 생각하게 됐죠." 언니의 죽음으로 그는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자체도 너무 싫었다고 했다.
"스님이 도대체 뭔가. 동화 속에 나오는 거지란 말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산속에서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뜨려던 그를 붙잡은 이는 성철의 벗인 향곡 스님이었다.
그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말을 책에서 너무 자주 쓴 것 같아 쑥스럽다"고 했다.
석남사에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성철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도인 중에는 미친 도인, 숨어 사는 도인,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이 있다. 또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이 있는기라. 니는 어떤 도인이 되고 싶노?" 이 말에 그는 숨어 사는 도인이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니 중근기이고,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은 하근기인기라. 제일 상근기(上根機ㆍ높은 수준)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기라." 대중의 눈에서 '숨어 살던' 불필 스님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57세 나이로 출가했다.
두 분 다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뭐가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친구인 묘엄 스님(청담 스님 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출가한 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절에 와 보니 항상 '내일이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쳐요. 속가에서 보낸 시간이 아까워 더 일찍 출가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지요." 그는 아직도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살기 팍팍한 세속을 향해 한 말씀 청하자 스님은 성철 스님이 종정에 추대된 이듬해인 1982년 내린 첫 한글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언급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법어를 다 봤으면 좋겠어요. 봐도 봐도 진금이지요. 자성을 바로 보는 것 말고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인사(합천) = 이향휘 기자
결혼하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출가한 성철 스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첫째딸은 열 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딸이자 현재 유일한 혈육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75)이다. 진주사범학교 2학년이던 그는 아버지를 만난 뒤 스무 살의 나이에 출가한다. 유복한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이 망했구나" 탄식했고, 남편에 이어 딸까지 세속을 등지자 어머니는 "독사보다 더 지독하다"고 말했다.
최근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를 펴낸 불필 스님은 18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기자들과 처음으로 만나 "안정사에서 두 번째로 큰스님을 뵌 이후부터는 (성철 스님은) 아버지가 아닌 큰스승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회고록은 올해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주변의 권유로 펴낸 것이다.
그에게 성철 스님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를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어요. 언니가 있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지요. 아홉 살 때 언니가 죽고 나니, 왜 나는 아버지가 없는가 스스로 생각하게 됐죠." 언니의 죽음으로 그는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자체도 너무 싫었다고 했다.
"스님이 도대체 뭔가. 동화 속에 나오는 거지란 말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산속에서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요."
아직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눈에 빛이 나고 부리부리했지요." 그러나 성철 스님은 매정했다. 아버지를 처음 찾아온 딸에게 그는 "가라,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뜨려던 그를 붙잡은 이는 성철의 벗인 향곡 스님이었다.
그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말을 책에서 너무 자주 쓴 것 같아 쑥스럽다"고 했다.
석남사에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성철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도인 중에는 미친 도인, 숨어 사는 도인,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이 있다. 또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이 있는기라. 니는 어떤 도인이 되고 싶노?" 이 말에 그는 숨어 사는 도인이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니 중근기이고,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은 하근기인기라. 제일 상근기(上根機ㆍ높은 수준)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기라." 대중의 눈에서 '숨어 살던' 불필 스님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57세 나이로 출가했다.
두 분 다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뭐가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친구인 묘엄 스님(청담 스님 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출가한 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절에 와 보니 항상 '내일이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쳐요. 속가에서 보낸 시간이 아까워 더 일찍 출가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지요." 그는 아직도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살기 팍팍한 세속을 향해 한 말씀 청하자 스님은 성철 스님이 종정에 추대된 이듬해인 1982년 내린 첫 한글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언급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법어를 다 봤으면 좋겠어요. 봐도 봐도 진금이지요. 자성을 바로 보는 것 말고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인사(합천) =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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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말의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데.
행복은 인격에 있다는 말 진정한 글 이지요.
글은 알지만 실천이라는 행동은 쉬운일은 아닌가봅니다.
오늘 이글들을 보면서...
다시 뒤돌아보고 생각도 해보고 실천을 하면 정말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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