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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꼭 빼닮은 독재자들의 '네버랜드'

호국영인 2014. 3. 8. 07:00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꼭 빼닮은 독재자들의 '네버랜드'

독재자가 되면 취향이 비슷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독재자가 되는 것일까. 물론, 과잉과 사치도 취향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독재자의 야반도주 후 성난 군중이 가장 먼저 몰려가는 곳은 그들이 살았던 집이다. '집'이라 부르기도 미안해지는 그 거대한 건물들은 나라를 막론하고 신기하리만큼 서로 닮았다. 중세풍의 화려한 로비와 금으로 만든 화장실, 사치스러운 샹들리에…. 피터팬이 살았던 동화 속 '네버랜드'가 영원히 어린이이기를 꿈꾸는 이들의 낙원이었다면, 이들 독재자의 네버랜드는 영원한 권력을 꿈꾸던 그들만의 궁전이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집에 개인 동물원이 있었다면,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대통령은 애완용 사자를 길렀다. 야누코비치와 지네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이 수십여대의 외제차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필리핀 독재자의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3000여켤레의 구두 컬렉션을 자랑했다.
■ 야누코비치의 '궁전' 카다피의 '요새'
지난 2월22일(현지시간) 야누코비치가 버리고 떠난 호화 대저택 '메지히랴(Mezhyhirya)'가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됐다. 메지히랴의 넓이는 141만6400㎡로, 여의도 면적의 절반 수준에 이르며,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맞먹는다. 5m 높이의 펜스로 둘러싸인 야누코비치의 저택은 그의 최측근을 제외하면 일반 사람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다.
야누코비치는 스포츠를 좋아했던지 저택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각종 시설들이 구비돼 있었다. 골프장과 테니스 코트, 승마장, 사격장은 물론 사냥터와 요트 선착장, 개인 복싱링까지 설치돼 있다. 대형 차고 안에는 롤스로이스를 비롯한 70여대의 빈티지 클래식 외제차와 값비싼 모터사이클이 줄줄이 도열돼 있고, 거대한 인공호수 위에는 15~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쓰인 대형 해적선이 띄워져 있어 테마파크를 방불케 했다. 그만을 위한 개인 동물원에는 타조와 공작새가 뛰놀고 있었다.
그가 메지히랴를 건설하는 데 쓴 돈은 모두 7500만달러(약 803억원). 그중 950만달러를 쏟아부은 '클럽 하우스'란 이름의 건물은 그가 가장 공을 들인 메지히랴의 핵심이다. 레바논에서 공수해온 향나무로 만든 문짝을 위해 6만4000달러가 쓰였고, 고급스러운 계단 목재에 20만달러, 계단 난간과 네오클래식 기둥에 43만달러를 퍼부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수십개의 샹들리에는 한 개당 10만달러가 넘는다. 또 사저에는 야누코비치의 개인 예배당이 있었는데, 수많은 성화와 금으로 치장한 단상이 중세 성당 못지않은 웅장함을 자랑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35%가 빈곤선 밑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메지히랴를 목격한 반정부 시위대가 얼마나 큰 분노를 느꼈을지 상상할 만하다. 시위대는 저택 입구에 "도적질을 일삼는 오만함을 보여주는 이 증거(메지히랴)를 파손하지 맙시다"라는 호소문을 붙였다. 시민들은 "국민의 돈으로 지어진 곳인 만큼 이 저택을 병원 혹은 아동보호기관으로 개축하거나, 시위에서 숨지거나 다친 이들을 돕는 곳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누코비치에게 개인 동물원과 해적선이 있었다면, 리비아의 카다피에게는 애완용 사자와 함께 테마파크에서나 볼 수 있는 회전목마와 찻잔 놀이기구가 있었다. 2011년 8월25일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한 리비아 반군들은 그동안 불가침영역이던 카다피의 요새 안에 발을 내디딘 순간,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군사요새로 알려졌던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 안에는 놀이동산에나 있는 각종 탈것들이 설치돼 있었고, 놀이동산 옆 동물원은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선물한 수많은 진귀한 동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 압권은 18마리의 애완용 사자였다.
카다피가 거주했던 '궁전'은 고급 대리석으로 치장했으며, 벽에는 예술작품이 걸려 있었다. 방마다 앤티크 가구들이 채워져 있고, 큰 방들에는 욕조가 있는 고급 욕실이 딸려 있다. 카다피는 요새 내에 영화관을 만들고 가족들과 최신 서구영화를 즐겨 본 것으로 전해졌다. 요새 중앙에는 '저항의 집'이 있다. 1986년 미국의 공습으로 이 건물이 파괴될 당시, 생후 수개월밖에 되지 않은 수양딸 한나가 숨졌다. 어린 딸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카다피는 이 건물 안에 있던 그녀의 방 침대와 램프 등을 모두 유리로 둘러싸 25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놓았다.
카다피 자식들의 저택도 사치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해변에 위치한 카다피의 셋째 아들이 살던 빌라에는 람보르기니와 BMW, 아우디 등 고급 승용차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으며, 빌라 내 사무실에는 100억원을 웃도는 요트와 고급 자동차 카탈로그가 쌓여 있었다. 카다피 일가의 저택을 본 한 반정부군은 "리비아 어린이들은 카다피 때문에 어린 시절을 빼앗겼는데, 그의 아이들과 그의 가족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다"며 분노했다.
반군을 피해 도망다니던 카다피는 결국 그해 10월 하수구 밑에서 발견돼 사살됐다. 카다피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연설했던 장소인 저택 앞의 뜰은 한동안 애완동물 시장으로 쓰였다.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요새 안에서 발견된 크고 널찍한 개인 수영장.
■ 왕을 꿈꾼 차우셰스쿠와 후세인의 '신전',
루마니아를 25년간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그의 저택보다 큰 건물은 세계에서 오직 하나, 미국 펜타곤뿐이다. 후에 '의회궁전'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차우셰스쿠가 맨처음 그의 저택에 붙인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민의 집'이었다. 그는 1972년 북한의 김일성을 방문했을 때 '인민의 집'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우월함과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건물은 가장 크고 호화로워야 했다.
지상 12층, 지하 8층으로 이뤄진 건물에는 1100개의 방이 있었으며, 3500메트릭톤(Mt)의 크리스털과 나무 90만㎥, 70만t의 철강과 청동이 아낌없이 쓰여졌다. 저택 안에는 480개의 샹들리에가 설치됐고, 집 안을 수놓은 거울과 전구가 1409개에 달했다. 또 바닥에는 특별 제작된 양탄자가 깔렸는데, 양탄자를 다 합한 넓이가 무려 20만㎡였다고 한다.
이 거대한 건물을 짓느라 700명의 건축설계사가 동원됐으며, 건축현장에는 2만명 이상의 일꾼이 상주했는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은 교대를 해가며 하루 24시간 일했다. 공사 때문에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역사유적지 20%가 파괴되었고, 당시 루마니아 국가예산의 30%가 여기에 소비됐다.
차우셰스쿠는 의회궁전을 짓기 위해 빌려온 해외 차관을 갚으려, 루마니아에서 생산된 농산품과 공산품 대부분을 해외에 수출했다. 그러는 동안, 루마니아 국민들은 사실상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1989년 거센 민중봉기로 차우셰스쿠가 실각하게 된 데는 의회궁전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반정부 시위대를 피해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갔지만 붙잡혀 곧바로 처형됐다. 그의 사후 10년 동안 이 거대한 건물을 어디에 써야 할까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의회궁전은 콘퍼런스센터이자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현대미술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고대 바빌론 왕국의 2대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유적터 위에 세워진 사담 후세인의 별장.
차우셰스쿠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을 짓고 싶어한 독재자였다면,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말 그대로 진짜 '신전'을 지은 사람이다. 그는 고대 바빌론 왕국의 2대 국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유적터 위에 자신의 여름 별장을 지었다. 고고학자들은 기함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를 칭송하는 고대 상형문자가 새겨진 2~3피트 높이의 옛 벽돌 유적 위에는 6000만개가 넘는 모래 벽돌이 새로 올려졌고, 그 벽돌에는 "이라크의 수호자, 사담 후세인이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지구라트(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모양으로 지어진 후세인의 별장은 축구 경기장 5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이를 위해 마을 주민 1000여명이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4층 높이의 건물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궁궐과 똑같이 600개의 방이 있었으며,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넓이만 수만㎡에 달했다. 벽의 사면에는 고대 바빌론과 바빌론탑을 그린 벽화가 새겨졌고, 화장실에는 금으로 만든 변기가 놓여졌다.

하지만 이 별장은 그가 지은 수십개의 궁궐 중 하나일 뿐이었다. 후세인은 이곳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바빌론 왕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치적용 궁궐을 짓는 데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독재자들은 또한 하나같이 사치스러운 취미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23년간 튀니지를 주무른 벤 알리가 도주한 대통령궁에서는 40여대의 스포츠카가 발견됐고, 1986년 말라카냥궁을 접수한 필리핀 국민들은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 3000여켤레에 혀를 찼다. 카다피는 금을 사랑했는데, 그의 딸 아이샤의 집에서 발견한 인어 모양의 황금색 소파는 카다피의 말로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됐다.

3000여켤레를 자랑하는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구두 컬렉션.
■ 영원한 독재를 향한 '어리석은 주문'
파이낸셜타임스는 독재자들의 집을 포함한 모든 가구들이 실용성이나 편리함과 상관없이 무조건 크고 화려한 이유는 "크기와 화려함으로 방문자를 압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집주인의 절대적인 권력 앞에 방문객들이 자신을 하찮고 비루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절대왕정풍의 가구와 반짝이는 대리석은 부유함과 더불어 영속할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자신들의 독재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주문이었을까.
그러나 한때 기세등등한 위용을 자랑했던 그들의 궁전은 정권이 무너진 후엔 애완용 동물 시장으로 전락하거나 미군의 본부로 쓰이고, 혹은 애물단지가 되어 쇼핑몰 회사에 넘겨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화려한 수집품들 역시 강제환수돼 경매에 부쳐지는 수모를 면치 못했다.
<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