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

독도수호에 평생 바친 김영복씨 별세

호국영인 2013. 4. 27. 08:31
독도수호에 평생 바친 김영복씨 별세

 


휴전뒤 혼란기 독도 침탈 막아

독도의용수비대원과 독도경비대원으로 활동하며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키위해 평생 애써온 김영복씨가 25일 저녁 8시 담도암을 이기지 못하고 별세했다. 향년 84. 그의 영면으로 훈장을 받았던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 가운데 생존자는 9명으로 줄었다. 울릉도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5월부터 12월까지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하며 독도를 지켰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1954년 3월27일 전역한 직후 독도의용수비대에 합류했다.

그는 1955년부터는 경북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채돼, 독도경비대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울릉도와 독도 해상을 지키는 화랑호 선장과 정장으로 근무하다 1974년 10월 퇴직했다. 그는 이후에도 울릉도에 살며 어업에 종사하는 등 독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줬고, 1996년 4월6일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그는 27일 경북 영천시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된다. 독도의용수비대는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의 독도 침탈 행위가 잦아지자, 1953년 4월20일 울릉도 청년들이 모여 만들었다. 1956년 12월30일 경찰에 독도수비 업무를 인계할때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독도를 침범한 일본 순시선 등을 퇴치했다.

1954년 5월23일 오전 10시30분께 독도로 다가오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즈가루호에 경고사격을 해 물러나게했고, 같은달 28일 오후 3시께에는 독도에 정박한 일본 어업실습선 다이센호를 추방했다. 같은해 8월23일 오전 8시께에는 독도를 침범하려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끼호에 600여발의 기관총 사격을 가해 퇴치했다. 또 같은해 10월2일 오전에는 독도로 다가오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오끼호와 나가라호를 대포로 위협해 도망가게했고, 같은해 11월21일 오전 7시께에는 독도로 오고 있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헤꾸라호와 오끼호에 박격포 9발과 중기관총 500여발, 경기관총 500여발을 발사해 물리쳤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일본 순시선에서는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정부는 9일 뒤 한국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정부를 대신해 독도를 지켰던 울릉도 청년들의 활약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독도의용수비대원의 정확한 숫자를 두고는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1996년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감사원은 2007년 4월 훈장을 받은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공적이 불분명하다며 국가보훈처에 공적을 재심사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국가보훈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1년동안 조사를 했지만, 큰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김점구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사무처장은 “33명이 훈장을 받았지만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정확히 몇명인지는 역사적 분석이 잘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논란거리다. 동지회는 33명 가운데 실제 독도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17명 정도로 보고 있다. 앞으로 정확한 역사적 분석이 분명 필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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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수호에 평생 바친 김영복씨 별세하였다는 뉴스에.

    휴전뒤 혼란기에 독도 침탈을 막았고

    독도의용수 비대원과 독도 경비대원으로  평생을 독도를 지키며

    살다가신 이런분들이 계셨기에 독도는 대한민국에 변함없이 

    그 자리에 의연히 서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