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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좀 구해줘요..인간이 파놓은 높이 2m '콘크리트 함정'

호국영인 2019. 6. 14. 08:11

누가 좀 구해줘요...

인간이 파놓은 높이 2m '콘크리트 함정'

       

[경향신문] ㆍ야생동물 지옥 ‘농수로’

지난해 12월6일 충남 예산군 응봉면에서 농수로에 빠진 채 발견된 고라니의 모습.

72곳 200㎞ 구간 표본조사 폐사 흔적 10㎞당 9건꼴 발견 지난 2년간 650마리 구조돼 장거리·콘크리트 재질 대부분 탈출시설 만들어 피해 줄여야 국회서 관련 토론회 열리기도

지난해 12월6일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에는 충남 예산군 응봉면 입침리의 농수로에 고라니들이 빠져 있다는 구조 신고가 들어왔다.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급히 출동해 보니 해당 농수로에는 고라니 3마리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갇혀 있었다. 입침리에서 인근 오가면 원평리까지 이어진 이 농수로는 매년 센터에 야생동물이 빠져 있다는 신고가 다수 들어오는 곳이다. 국립생태원의 농수로 조사에서도 예산군의 농수로는 다수의 야생동물 사체가 발견되는 꼿으로 꼽힌다. 수㎞에 달하는 농수로에 빠진 야생동물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굶어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농민들에게 필요한 농수로가 야생동물에게는 탈출 불가능한 함정이 되는 셈이다.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생태친화적 농수로 확대를 위한 국회 토론회’에서 국립생태원 우동걸 연구원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고라니나 노루, 개처럼 비교적 몸집이 큰 동물은 물론, 너구리나 족제비 같은 소동물, 소쩍새나 비둘기 같은 조류까지 다양한 야생동물과 가축들이 농수로에서 사고를 당하고 있다. 전국 농수로 중 72곳 200㎞ 구간을 표본조사한 결과, 1㎞당 약 0.88건의 폐사 흔적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1㎞당 3건 이상이 확인되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콘크리트 농수로에서 구조된 야생동물 수는 650마리에 달한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임이자 의원(자유한국당)이 주최했다.

동물들이 농수로에 빠지면 탈출하기 힘든 까닭은 무엇일까. 길고 깊게 파인 데다 콘크리트 재질이 많아 한 번 빠지면 탈출하기 힘든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이 지난 1~5월 실시한 피해현황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출로가 설치돼 있지 않은 높이 2m 이상의 콘크리트 수로는 야생동물의 폐사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라니 3마리가 한날 구조된 예산군 농수로의 경우 폭은 약 18m, 높이는 2m 이상이다. 작은 동물들은 이보다 작은 수로에 빠져도 목숨이 위험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현재 국내 농수로는 용수로 중 흙 수로가 5만4108㎞, 콘크리트 수로가 6만6234㎞, 배수로 중 흙 수로가 4만6799㎞, 콘크리트 수로가 2만3688㎞이다. 전체 농수로의 연장은 19만829만㎞다. 이는 지구 둘레의 약 4바퀴 반에 해당한다. 특히 비교적 동물이 탈출하기 쉬운 흙 수로는 줄어들고, 탈출하기 어려운 콘크리트 수로는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12월6일 충남 예산군 응봉면에서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직원들이 농수로에 빠진 고라니를 구조하고 있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제공

농수로로 인한 야생동물 피해에 대해 전문가들은 농업 및 식량자원 확보를 위해 농수로가 꼭 필요하지만 야생동물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야생동물 이동통로를 설치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우동걸 연구원은 “예산군 신정리의 농수로에 임시 탈출시설 및 무인센서 카메라를 설치해 모니터링한 결과 지난 4월5일 고라니 1마리가 비스듬하게 길을 낸 탈출시설을 통해 농수로를 빠져나가는 게 관찰됐다”며 “너구리 등 소형 포유류와 양서·파충류도 경사식 탈출시설을 이용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임이자 의원은 이날 토론회에서 “콘크리트 수로는 특히 주변 생태계와의 연결성을 단절시켜 농촌의 생물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다”며 “용수 공급과 안전 측면에서 콘크리트 농수로가 반드시 필요한 지역에는 야생동물 탈출로를 설치하고, 주변 생태계와의 연결성 등을 확보하는 등 생태·환경적 기능을 고려해 야생동물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