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 노벨상 상금을 거부했으나...
[기억할 오늘] 11월 18일
조지 버나드 쇼(1856~1950)
영국 노동당의 토대가 된 페이비언 협회(Fabnian Society)는?1884년 1월 런던에서 설립됐다. 혁명이 아닌 생활 개혁, 특히 청빈 실천 등을 통해 사회를 계몽ㆍ계량함으로써 자본의 계급 소유에서 집단 소유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자는 취지의 온건 사회주의자 모임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H.G 웰스 등과 함께 원년부터 가담한 열성 회원이었다. 그가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거액의 상금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처음 수상을 거부했다가, 상은 받고 상금 수령만 거부했다가, 결국 상금을 다 받았다. 1926년 11월 18일 상금 거부 입장을 공표하며 그가 했다는 말은 이렇게 알려져 있다. “나는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건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만이 노벨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only a fiend in human form could have invented the Nobel Prize.)” - 마이클 홀로이드의 평전 ‘버나드 쇼’
앞서 쇼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도움을 요청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쇄도했고, 그 액수를 다 합치니 거의 상금 총액이 되더라고 어거스틴 해먼이라는 친구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수상 거부 소식이 보도된 뒤에는 거액의 상금을 포기할 만큼 부자라면 자기 아이를 입양해달라, 집 담보대출금을 갚아달라 등등의 편지가 또 그만큼 날아오더라.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것은 자기를 가정부로 써달라는 두 여성의 편지였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한 것은, 상에 거액의 상금을 얹어 줌으로써 자신을 힘들게 하고 세상을 현혹시켰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놓고 말하지 않은 수많은,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생각들이 담겨 있었을 수도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그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할 정도였고, 런던으로 온 뒤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벌며 부유한 친구들에게 빌붙어 지내야 했다. 형편이 나아진 것은 극작가로 이름이 알려진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G.K. 체스터턴이 그에게 “쇼, 자네를 보면 아일랜드 기근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겠군”하고 농담했고, 그가 “맞아, 그리고 자넬 보면 그 원인이 자네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을 거야”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마른 체구였고, 런던 출신의 체스터턴은 뚱뚱했다.
1984년 페이비언 협회의 창립100주년 기념메달. 거북은 ‘느린 진전(slow and progressive tactic)’의 상징. 쇼는 “영웅적 패배보다 지루한 승리”를 추구했다.
어쨌건 페이비어니스트인 그에게 노벨상은 “노벨 현금상(Nobel Cash Award)”이었고, 자기에게 “먹고 살 돈”은 있었다. 쇼는 나중에 상금을 스웨덴 문학의 영어 번역사업에 써달라고 노벨위원회에 요청했다가 위원회가 거부하자 결국 스스로 자선기금을 만들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q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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