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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쥬니어 이야기

호국영인 2015. 5. 19. 19:24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쥬니어 이야기

지난 가을,
우리집 막내 세찌가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며 개를 한마리 데리고 왔다.
아내는 "호랑이띠가 있는 집에는 개가 못큰다"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은근히 반가웠다.
우리집의 '주워온 아들 ' 배성재도 기회만 되면 "평창동 마당에 개만 한마리 있으면 최곤데..." 하고는 슬쩍슬쩍 졸랐던 일이다.
하나마나한 뻔한 약속이지만 "엄마는 상관 안하고 전혀 신경 안써도 되게끔 내가 다 관리하겠다"는 다짐을 몇 번씩 하고서야 세찌가 쥬니어를 데리고 나타났다.

도베르만.
까맣고 아주 순하게 잘 생긴 두달 된 새끼 도베르만이었다.
세찌가 쥬니어를 안고 들어서는 순간 모든가족이 쥬니어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우리 가족이 될려고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외손녀딸 서영이만 아직도 쥬니어가 무섭다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한다.
어느 집이라도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허락을 받아서 개를 집에 들여놓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개를 돌보는 일은 결국 엄마몫이다.

그것은 애들 등살에 개를 키워본 부모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집이라고 해서 더하면 더했지 다를게 뭐 있겠는가.
"뭐, 니가 다 키운다고?!?!?!"
이러고 세찌를 욕하면서도 입이 짧은 쥬니어 밥을 챙겨 먹인지 벌써 8개월이 되어간다.
얼마나 잘크는지 이제는 반갑다고 앞다리를 들고 이빨을 내보이며 나를 향해 뛰어오르면 겁이 날 정도로 덩치가 컸다.
작은 송아지만 하다. 또 힘은 얼마나 센지 오히려 내가 끌려 갈 정도다.
그래도 이제는 몸매도 날렵하고 늠름해서 멋진 사냥개 티가 제법난다.
온 가족이 잘생긴 쥬니어를 자랑스러워하고 정말 좋아한다.

혈통이 뛰어나다는 세찌 자랑에 잘키우고 가르쳐서 애견 콘테스트에 데려가볼까 하는 꿈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꿈일 뿐이었다.
귀가 늘어지면 귀에서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다며 귀수술을 해야한다고 졸라서 세찌랑 같이 가서 거금을 들여 귀를 성형해줬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대부분 도베르만은 근육질 몸매에 바짝 선 귀가 포인트다. 그래야 용맹스러워 보이고 멋있다.
사진에서 본 도베르만을 상상하며 힘들게 귀수술을 마치고 아퍼하는 쥬니어를 안고 와서는 지극정성으로 치료를 해줬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짝 설것이라고 기대했던 귀 한쪽이 서질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서있던 귀가 자꾸 힘을 못쓰고 주저앉아버렸다.
귀에 가벼운 봉 같은 것을 붙여서 같이 세워봐도 효과가 없었다.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봐도 왼쪽 귀가 힘없이 푹 주저앉았다.

아이고.....
성형부작용, 바로 그 성형부작용이다.
얼굴이 잘생겼으니 잘 키워서 개 콘테스트에도 데려가야겠다고 하던 쥬니언데 그만 성형 부작용으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내는 그런 쥬니어를 축복했다.
"너가 복이 많은 거야. 너 귀가 멀쩡했으면 콘테스트 나가겠다고 할아버지랑 세찌가 엄청나게 너를 귀찮게 했을텐데 얼마나 다행이냐. 너는 복이 많은거야."

아쉽지만 그런 모습으로는 예선탈락이라고 세찌가 먼저 포기를 했다.
내가 봐도 입상은 그만두고 아예 출전 자격이 안되는게 확실해 보였다.
알고보니 이것저것 꽤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했다.
두리는 오히려 꼬그라진 귀가 매력포인트라며 좋아했다.
나와 세찌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도 애교가 많은 쥬니어는 우리집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다.
그런데 그 우정에 금이가는 일이 생겼다.
쥬니어는 덩치도 그렇고 나이도 아직 어려서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못하고 엄청나게 많이 움직인다.
온집을 위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헤집고 다니고 산보도 하지만 그래도 더 뛰어놀고 싶어서 어찌나 나를 귀찮게 하는지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아이패드를 들고 메모를 하면서 축구를 보고 있으면 같이 놀자고 팔뚝을 툭툭치다가 그래도 내 일만 하면 아예 무릎위에 턱을 괴고 비집고 들어온다.
엄마젖을 가장 늦게 먹은 막내라서 입도 짧고 어리광이 많다고 했다.
어느날 너무 귀찮아서 힘을 빼게 하려고 내가 뛰는 런닝머신 위에 올려놓고 뛰게했다.
곧잘 템포도 맞추면서 뛰었다.

그렇게 혀를 쑥 빼고 30분 정도 뛰고 나면 피곤한지 내 옆에서 눈을 스르르 감고 조는데 그럴때면 나도 한결 수월해서 조용히 축구를 볼수도 있고 아주 좋았다.
매일 놀아주기 귀찮을 때면 내가 운동하는 옆에서 쥬니어는 런닝머신을 뛰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쥬니어가 지하에 있는 내방근처에는 얼씬도 안하려고 기를 썼다.
아무리 끌고 가도 싫다고 달아났다.
내가 집을 비운날,
두리가 운동을 하려고 지하실 내방으로 갔는데 쥬니어가 같이 들어가지 않을려고 뒷걸음질을 치고 가버리더라고 했다.
런닝머신을 보는 것도, 내방에 들어가는 것도 싫은 것 같았다.
쥬니어의 노골적인 반발에 '개를 30분씩나 기계위에서 뛰게하니 좋아하겠냐!'며,
늘 뭐든지 과하게 하는 나를 온가족이 고소해 하며 힐책했다.
내가 그런 면이 좀 있긴하지. 하하하
쥬니어가 너무 싫어하는 바람에 나도 할 수 없이 포기했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하루종일 아내를 따라다니는게 귀찮았던지 쥬니어 좀 데리고 있으라며 개과자를 투명한 통에 넣어서 과자와 함께 쥬니어를 지하실 내방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싫어하던 내 방으로 졸졸 따라 들어오더니 아내를 따라 나가지 않고 내 옆에서 과자통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 달이 훨씬 넘게 싫다고 안들어오더니 과자통을 보고 들어온 것이다.
쥬니어한테도 뇌물이 통한 것이다.
과자를 주니 조용히 소파 위에 깔아놓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기다리기까지 했다.
뇌물의 위력은 생각보다 그 효과가 컸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뇌물로 쥬니어를 다스리는던 단순한 즐거움이 조금씩 씁쓸해졌다.
과자통이 내 방에 있고부터는 쥬니어가 그냥 들어와서 내 옆에 있기만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런닝머신에 올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과자를 먹었으니 나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님 런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을 내가 무척 흐믓해 하고 좋아한다는걸 알고 쥬니어가 먼저 나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걸까?
쥬니어는 과자를 먹고 싶으면 런닝머신 위에 올라가서 나를 바라보며 뭔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개도 이렇게 뇌물을 먹기 위한 세상살이를 터득하고 아는데 사람이라고 그 위력을 모르겠는가!
과자의 달콤한 유혹.
물론 개는 과자를 너무 좋아하면 안되는 이유를 모른다.
그냥 맛있어서 먹고싶은 것이다.
몸에 나쁘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도 없다.
그냥 먹고 싶으면 조르기도 하고 애교도 부리고 운동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지면 안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과자[?]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나,
과자를 얻어 먹고 뭔가 보답하고 싶어서 먼저 알아서 할 일[?]을 해주는 심리는 사람이나 쥬니어나 별반 다르지 않는것 같다.
쥬니어의 하는 짓을 보고 나를 본다.
돈, 명예, 권력.....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든 간에 쥬니어처럼 유혹에 나를 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잘 살아야할텐데.
지나간 삶을 되돌아 보면 나혼자만 아는 부끄러운 일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제껏도 그렇지만 나이들어 부리는 욕심은 더 추한 것이다.
간식 하나 얻어먹으려고 침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는 쥬니어처럼은 하지 말아야지.

쥬니어,
넌 개니까 괜찮아.
너 얘기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