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예비회담 1951년 5월 31일과 6월 5일에 미국은 두 차례에 걸친 막후 접촉을 통해 소련과 정전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했다.
공산군 측은 북경방송을 통해 이에 응답했고, 몇 차례 의견이 오간 끝에 정전회담 예비회담을 7월 8일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회는 1951년 6, 7월의 전황 모습, 정전회담 실무자들의 첫 만남 등 NARA 소장 사진들로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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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기자의 NARA 앨범 32] 1951년 6, 7월의 전란 현장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정전회담을 위한 유엔군 측 실무자들과 공산군 측 실무자들의 첫 만남(1951. 7. 8.).
ⓒ NARA
정전예비회담
1951년 5월 31일과 6월 5일에 미국은 두 차례에 걸친 막후 접촉을 통해 소련과 정전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6월 27일에 소련이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회담에 임할 뜻을 보여왔다. 이에 미국도 정식 의사를 통보했고,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에게 예비교섭을 지시했다.
이에 리지웨이는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에게 현 전선에서 정지하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했다. 이어 1951년 6월 30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군 측에 회담 일시와 장소에 대한 제안을 했다.
공산군 측은 북경방송을 통해 이에 응답했고, 몇 차례 의견이 오간 끝에 정전회담 예비회담을 7월 8일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예비회담에서는 대표명단 교환, 정식회담의 개최, 상호 안전에 관한 사항 등이 논의됐다. 예비회담 결과 7월 10일 오전 11시에 개성 내봉장에서 정식으로 정전(휴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번 회는 1951년 6, 7월의 전황 모습, 정전회담 실무자들의 첫 만남 등 NARA 소장 사진들로 엮었다.
▲ 한국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 항(1951. 6. 13.).
ⓒ NARA
▲ 국민방위군(1951. 6. 22.).
ⓒ NARA
▲ 미 공군 F86 전투기가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1951. 6.).
ⓒ NARA
▲ 미 제7함대 전투기가 북한 동해안 상공을 날고 있다(1951. 7. 1. ).
ⓒ NARA
▲ 미군들이 한국인에게 구제품을 나눠주고 있다(1951. 7. 3.).
ⓒ NARA
▲ 고지전, 전략상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1951.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