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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기자의 NARA 앨범 24] 1951년 1월의 전란 현장Ⅰ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강추위로 꽁꽁 언 한강을 걸어서 떠나는 피란민 행렬(1951. 1.).
ⓒ NARA
1?4 후퇴
국군과 유엔군이 북의 점령지에서 철수하자 전선은 다시 38도선을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50년 12월 31일 중국군의 신정 총공세가 시작됐다. 그러자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38선 일대의 모든 유엔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유엔군 부대는 한강에 설치된 임시교량을 이용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 평택-안성 선까지 후퇴했다.
서울시민들은 다시 피란길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바로 '1?4 후퇴'였다. 1951년 1월 4일 오후, 중국군은 거의 텅 빈 서울에 진주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시청 국기게양대에는 다시 인공기가 펄럭였다. 수도 서울은 또다시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
이번 회는 1?4 후퇴 당시 NARA 소장 사진 중심으로 엮었다.
▲ 서울 북쪽 10마일 지점에서 후퇴하는 유엔군들(1951. 1. 3.).
ⓒ NARA
▲ 인천역 플랫폼에서 남행열차를 타고자 몰려든 피란민들(1951. 1. 3.).
ⓒ NARA
▲ 인천역 플랫폼에서 남행열차를 타고자 몰려든 피란민들(1951. 1. 3.).
ⓒ NARA
▲ 한 미 해군 장교가 피란민에게 담배(Lucky Strike)를 권하고 있다(1951. 1. 3.).
ⓒ NARA
▲ 대구, 신병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에게 사격교육을 시키고 있다(1951. 1. 4.).
ⓒ NARA
▲ 공산군의 시신들(1951. 1. 4.).
ⓒ NARA
▲ 경부선 대구역에 정차한 열차와 플랫폼의 피란봇짐(1951. 1. 8.).
ⓒ NARA
▲ 대구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피란민들(1951. 1. 8.).
ⓒ NARA
▲ 인천에서 부산항으로 도착한 피란민들이 양곡과 함께 배에서 내리고 있다(1951.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