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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성류굴에서 6세기 신라 금석문 발견

호국영인 2015. 12. 17. 20:31

울진 성류굴에서 6세기 신라 금석문 발견

신라 진흥왕 때 중앙 관리가 방문해 남긴 것으로 추정

경북 울진군 근남면 성류굴 입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울진군 제공

경북 울진군 근남면에 있는 천연 석회암동굴인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신라 진흥왕 때인 543년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금석문(金石文ㆍ돌에 새긴 문장)이 발견됐다.

 

추정이 사실로 확인되면 지금까지 성류굴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인 8세기 통일신라 대 기록보다 150년쯤 앞선 기록이 된다. 비슷한 시기에 적힌 다른 신라 금석문과도 비교연구가 가능해 신라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울진군에 따르면 지난 6일 고고학 전공자인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성류굴을 조사하다 이 금석문을 발견하고 심현용 울진봉평리신라비전시관 학예연구사와 공동으로 내용을 판독한 결과 “계해년 3월 8일 △△축부지(△△丑付智ㆍ사람 이름으로 추정) 대나마(大奈麻)”라는 글귀를 확인했다.

여기서 ‘대나마’는 신라의 17관등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관직명이다. 신라의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에서 일하는 관리가 명승지인 성류굴을 방문해 벽에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글귀가 남겨진 시기인 계해년(癸亥年)은 543년, 603년, 663년 중 하나인데, 금석문에 나오는 ‘대나마’ ‘차시(此時)’ 등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에도 등장하는 표현이기에 그와 가장 가까운 543년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했다”고 밝혔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성류굴 입구에 새겨진 금석문을 탁본하고 있다. 위덕대학교박물관 제공

지금까지 성류굴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 통일신라 때 기록이다. 신문왕(재위 681~692년)의 왕자 중 하나로 왕위를 거부하고 출가해 승려가 된 보천(寶川)이 이 굴에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543년이라는 연도 비정이 사실이라면 신라가 첫번째 전성기를 맞았던 진흥왕 시대에 이미 성류굴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명승지로 알려졌다는 뜻이다. 이는 울진이 신라의 주요 지역거점이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은 “덕천리 신라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나 금귀걸이와 더불어 울진 지역이 신라가 팽창하던 6세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음을 뒷받침하는 발견”이라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석문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501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다. 그 뒤로 영월 냉수리비(503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울주 천전리 각석(525년), 제천 점말동굴 금석문(603년) 등이 있다. 특히 울주 천전리 각석과 제천 점말동굴 금석문은 신라 화랑들이 명승지를 찾아 심신을 수련한 내용을 암벽에 새긴 것이기에 학계에서는 성류굴 금석문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석문에서 확인된 글자는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十(?)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咎△” 정도로 대부분의 의미는 아직 알 수 없으나 ‘△△丑付智’라는 인물이 543년 3월 8일 성류굴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의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신라 금석문은 한자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고대 한국어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현(차자ㆍ借字)한 것이기 때문에 해독이 어렵다. 빠진 글자를 판독하고 다양한 금석문과 비교연구해야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영호 경북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금석문은 동굴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일부나마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동굴 내 전체적으로 글자가 남아있는지 등 면밀한 현장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그림 3성류굴에서 발견된 금석문에서 해독된 한문은 다음과 같다.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十(?)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尒△咎△”. 대부분의 의미는 아직 알 수 없으나 ‘△△丑付智’라는 인물이 543년 3월 8일 성류굴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덕대학교박물관 제공